진정한 의미의 전통 음식
어딜 가든 회색의 시멘트 건물만 보이는 도시. 시멘트의 성질을 따라 덩달아 차갑게 식어버린 도시는 바람이 불어도 부는지 모른다.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머리칼과 옷의 휘날림으로 겨우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지, 사람을 빼면 도시는 그저 한없이 적막하고 정적이다. 나의 유년 시절의 대부분이 있던 곳과는 다르게. 그곳은 어떠한 곳인가. 풀 따라 흙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부는 족족풀과 흙을 긁으며 자신이 날고 있음을 소리친다. 그래서 여름은 더할 나위 없이 뜨겁고, 겨울은 더할 나위 없이 춥다. 도시에 비하면 사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나 그럼에도 끝없이 동적이고 활기차다. 시골이란 그런 곳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 사실을 알고, 그런 연유로 일찍이 자연을 사랑했다. 충북 보은군 창리에 있던 낡은 집 마당에서부터 시작된 사랑이다.
그곳에서 나던 것들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종자나 쓰는 농자재가 외국산일지도 모른다는 복잡한 건 차치하고, 우리 가족 땅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으로 길러지고, 자라는 먹거리도 내 사랑의 대상이었다. 설령 이것만 먹고 살아야 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할머니가 종종 삶아 주시던 호박잎은 내 최애 쌈 채소였고, 할머니가 손수 콩을 갈고 고추를 말리며 만든 된장과 고추장으로 끓인 찌개는 국밥 부럽지 않았다. 이웃집에 꽈리고추와 청양고추를 주고 보답으로 받은 배추로 지진 배춧잎 부침은 웬만한 전보다 더 맛이 좋았다. 지금 이렇게 상상만 해도 좀 전에 주문한 치킨의 맛보다 더 간절해진다.
내가 그 시절 그 음식들을 사랑했던 연유를 “자연을 사랑해서”라는 단순한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여러 사실이 유기적으로 얽혀 사랑이란 결괏값이 도출됐다. 요소는 자연과 내가 발을 붙이고 사는 땅 그리고 조부모였다. 이 세 요소가 얽혀 어린아이가 자연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이유이나 단순하게 지어지지 않은 덕분에 아이는 자라서도 농산물을 이야기하고, 농산물을 짓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것 중 상당수가 우리 손에서 자라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못내 아쉬워하기도 하면서.
전통 음식인 고추장에 우리나라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전통 식품 품질 인증 품목 규격에 따르면 메주・고추장 등 106개 품목이 전통 식품 대상으로 적시돼 있다. 이름이 이름인 만큼 원료도 당연히 국산이어야 할 테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나라 전통 식품이 타국에서 자란 재료들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례로 고추장은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 중의 기본인 양념이다. 빨간 음식 중 고추장이 안 들어간 걸 찾기 어렵다. 그런데 시중에 판매되는 고추장들 상당수가 중국산 고추 양념 일명 ‘고추다대기’를 가공해 만들어졌다. 국산 고춧가루는 고사하고 중국산 고춧가루조차 들어가지 않은 채 만들어진 제품이 태반인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문제는 없다. 현행법상 고춧가루 함량이 6% 이상이면 고추장으로 이름 지을 수 있기에, 업체에서 고추 양념만 쓰거나 값싼 중국산 고춧가루를 소량 첨가해 만든 고추장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농림축산식품부의 전통 식품 품질 인증 규격에 걸맞은 고추장은 국산 고춧가루를 쓰면서 함량은 통상적으로 12%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비교하면 시중의 고추장은 전통 식품이 아니라 수입 조미료 수준이다. 안타까운 건 비단 고추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산 김치라고 하지만, 거기에 들어간 재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중국산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쓴 경우가 적지 않다. 전통 방식으로 메주를 만들고 있지만, 수입 대두를 쓰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 전통 음식들을 파헤치면 시골에서 자급자족한 음식이 아니고서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건 거의 없다. 사실상 우리 땅에서 난 것들로만 만들어진 전통 음식은 거의 없는 것.
우리나라 농산물을 쓰기 어려운 현실
나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한다. 농촌은 고령화와 인력 부족에 시달린 지 이미 오래다. 그에 비례해 국산 농산물의 가격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이 가격을 일반 서민이 무한정으로 감당하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제조사는 이익을 위해서든 소비자를 위해서든 수입 농산물로 눈을 돌려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대로 제품을 만들어 제공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일반 소비자도 경제 순환에 지속적으로 한 손을 거들 수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제는 기본값이 된 흐름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 또한 아니다. 전통이란 그럼에도 소수의 적극성과 모두의 자기희생으로 지켜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마냥 이익을 좇기만 해서도, 싼값을 좇기만 해서도 안 된다. 진짜 우리의 것으로만 만들어진 전통 식품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소비자는 때론 기꺼이 비싼 값을 내고 우리 전통 식품을 소비해야 한다. 제조사 측은 덜 남더라도 전통 식품에 온전한 우리 재료를 사용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이런 소비자와 제조사의 노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농가가 이를 체감할 수 있도록 전통 식품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알리고, 농가에게 지원을 아껴서는 안 된다.